잡담문
오래간만에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칠 때 누군가를 위해 치지 않는다. 나를 위해 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순간엔 참 만족스럽고, 어떤 순간엔 아쉽다. 남에게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진 않았으니 마음대로 칠 수가 없었고, 결국 나를 위해서도, 내가 원하는 소리를 듣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듣기 싫은 반복적 하농을 연습해야 하고, 답답해 보이는 악보에 정확한 박자로 소리를 담아야만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소리에 가까이 갈 수 있다.
나는 요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미련을 가지지 않으려 애쓴다. 내가 애쓰던 애쓰지 않던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한 명씩 세상과 이별하게 된다. 내가 어찌할 방법은 없다. 시간을 붙잡아 조금 더 빨리 성공해서 조금 더 멋진 모습에 도달하고 싶었지만 정작 언덕에서 미끄러진 것처럼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생긴 흉터들과 거칠어진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위협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며 생긴 상흔과 상처는 누군가에겐 인간적인 면으로 보이고, 누군가에겐 두려움으로 느껴지나 보다.
만화 '나루토'에 보면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 없이 힘들게 지내는 나루토를 괴물이라며 모든 이들이 배척한다. 마을의 영웅이며 동시에 구미라는 위험한 존재를 통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나루토를 괴물이라 부르다니. 사람들은 그런 나뭇잎 마을 사람들을 욕하지만 실제 세상이라고 뭐가 다를까. 참전 용사 분들의 삶을 보면 나루토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젊은 시절 생사를 오가는 전쟁터에서 싸웠지만 정작 돌아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도 지키기 힘든 삶을 사시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낙동강 전선이 무너져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 국가가 되진 않았을까.
귀한 이를 천하다 하며 천한 이를 귀하다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겠지만, 이 세상이 지나 다음 세상이 오게 된다면 귀한 이가 귀한 대접을 받기를 꿈꾼다. 이것이 나의 망상일지 몰라도 나는 그런 막연하지만 바라는 미래가 있다. 귀한 이가 귀한 대접을 받는 당연한 세상이, 현세에는 없을지라도 내세에는 꼭 존재하길 바라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운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운은 통제할 수 없고 오로지 할 수 있는 거라곤 나의 그릇을 키우는 길 뿐이었다.
나는 글을 읽는 걸 좋아한다. 말 그대로 입으로 읽고, 소리 내서 읽고, 적고, 말하고,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을 통해 배우는 게 있다. 바로 내 그릇이 얼마나 작은 지를 그때서야 알게 된다.
잘 모르는 것은 남에게 설명할 수 없다.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지혜는 깊은 셈에서 흘러나온 물과 같아서 지혜를 찾는 목마른 자의 목을 축인다 했다. 지혜로 빚어진 지식은 지식을 찾고자 하는 이들의 목마름을 만족시킨다. 그러기 위해선 더 큰 지식의 바다에 나를 던져야 한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작은 그릇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결국 못 보게 된다는 사실을 종종 기억하곤 한다. 아무리 미운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세상을 떠나고, 아무리 좋은 사람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나의 잘못을 알고 있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떠나고, 나의 좋은 점을 알고 있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떠난다. 결국 아무도 남지 않고. 아무것도 기억될 수는 없다. 설령 어딘가에 기억되더라도 그것은 흔적일 뿐 의미를 가지긴 어렵다.
아주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간이지만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그 무엇보다 실제적이고, 그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와 타인이 가진 나에 대한 판단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거대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이도 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이도 나다.
큰 비가 한참 내리는 날이 오면 뜨겁고 달콤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냥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면서 커피나 마시고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없이 잠에 들고 싶다. 진정으로 바란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 무엇도 욕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겠지.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찬양을 연주하면서도 열반을 꿈꿨다. 세상 모든 물이 떨어지는 것 같은 빗줄기 속에서 그 무엇에게도 구속받지 않은 열반에 가기를 꿈꿨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을까.
더워진 날씨로 이제는 반팔 옷을 입어야 하는 날이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밤 산책의 시간이 돌아온 셈이다. 조금 선선한 밤공기를 맡으며 이곳저곳 걷는 기분은 참 좋다. 내가 바라는 건 큰 건 아닌데 이것을 유지하는 데에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한가로이 밤산책을 즐기고, 원할 때 글을 쓰거나 피아노를 연주해 볼 수 있는 삶. 그걸 위해서 꽤나 무거운 삶의 무게를 힘겹게 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남들에게 피해나 부담을 주면서까지. 그만큼이나 나는 이기적이고 한적한 자유로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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