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어제는 이상한 날이었다. 하루 종일 미친 듯 피곤했다. 잠을 자도 도통 피로가 해소되지 않았다. 그제는 잠이 오지 않았는데 어제는 잠이 밀려오는 게 역시나 싶었다. 나는 잠자리를 바꾸면 언제나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편이다.
오늘도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어제 잠을 많이 자서 이젠 또 잠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보일러실의 거미 영감에 대한 영상을 보았다. 영상은 센과 치히로에 나온 인물에 대한 분석 영상이었지만 막상 그것을 다 보고 나니 영감의 삶을 상상해 보게 됐다.
'보일러실에서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집도 샀겠지. '
'그리고 그 집은 일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집 구조가 아닐까.'
'작은 마당이 있는 목조 주택이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해보니 거미 영감이 보일러실에서 수십 년간 열심히 일하는 모습도 멋지게 느껴졌다. 자신의 자리에서 오랫동안 최선을 다하면서 그 노동의 값으로 원하는 삶을 얻어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게 설령 작은 목조 주택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정말 멋진 일일 것이다.
나는 사실 아주 좋은 집을 꽤 다녀보았다. 예전 기록에도 적어뒀지만 더힐이나 유엔빌리지, 그리고 여의도나 강남, 잠심의 최고급 아파트나 빌라를 모두 가보았다. 정말 멋진 집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 살고 싶다는 마음보다 정작 본 적도 없는 거미 영감의 집이 더 애착이 갔다. 분명 관리하기는 더 어렵고 때로는 난장판이 된 잡초나 벽에 쌓이는 먼지와 황사도 다 씻어줘야겠지만 그런 주택이 더 가지고 싶었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수십억이나 되는 집보다도 얼마 되지도 않고 작고 허름할 수 있는 집이 더 동기부여가 된다니 말이다.
지금도 강남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아파트의 삶에 불편한 점은 별로 없다. 감사하게도 내 주변엔 시끄러운 이웃도 없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있는 작은 주택에 대한 생각이 종종 생긴다. 그곳에선 편하게 밤에도 연주를 할 수 있고, 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놀러 오면 마당에서 바비큐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관리하는 게 힘들다고 다들 하는데 만약 나라면 엉망인 상태로 두고서도 잘 지낼 것 같다. 그러다 손님이 올 때쯤 부랴부랴 관리를 하겠지.
다른 건 필요 없고 집에 그저 넉넉한 욕조가 있으면 좋겠다. 사실 더힐이나 그 밖의 아파트와 고급 빌라에서도 눈에 들어온 건 대단한 조경이나 으리으리한 입구와 대리석으로 마감된 건축재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피로를 녹일 수 있는 넓은 욕조만 있다면 충분했다. 그게 내가 원한 전부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이 몇 가지 있다. 가끔 목욕탕에 가서 몸을 녹이고, 사우나를 할 때. 쌀을 담아 찬 물에 헹굴 때 느껴지는 쌀알의 느낌과 밥이 지어지는 시간들. 해 질 녘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몇 개 아이스크림을 사 올 때. 간장 계란밥에 두르는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퍼질 때. 울림이 좋은 피아노로 오래된 곡들을 연주해 볼 때.
별 거 없다. 그렇게 비싼 취미도 없다. 나는 포르쉐를 타고 밤에 드라이브도 다니며, 백화점에서 VIP 소리 들으면서 선물을 몇 백만 원어치씩도 사봤지만 그것이 주는 행복감을 다 합쳐도 앞서 얻은 행복감과 크게 비교가 되진 않는 것 같다. 누군가에겐 고작 그게 행복이냐 하겠지만 나는 내가 즐기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된 것 같다.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노는 게 좋고, 그렇게 큰 것들에 관심이 많지는 않다.
물론 언젠가 큰 일을 할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원하는 일들을 제대로 펼쳐보고 싶기도 하다. 엊그제 나는 노트에 적어두었다. 한 1년 정도는 강의에 집중하자. 그리고 1년쯤 후에는 방송이 되던 CTO로 어딘가에 합류하던 뭔가 하자. 그리고 그다음 해쯤에는 해외로 나가서 살자. 해외로 나가서 살아야 원어민 수준으로 여러 언어를 하며 40대 중반에 내가 꿈꾸는 일들을 온전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언어야 해당 국가에서 1~2년 동안 현지 사람들과 소통하면 충분할 것 같지만 30대 중반에 나가보고 싶다.
7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서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경험을 쌓는다면 글로벌 파트너들과 더 유연하게 큰 일을 해볼 준비는 끝날 것 같다. 그쯤이라면 담대하게 다시 사업의 길에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2015년에 시작한 사업의 길이 2025년에 멈췄지만, 2035년에 다시금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나답게 계속 살아가고 싶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세계에 관심을 가지며. 아주 독특한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세상의 비밀들에 더 가까워지고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정승재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
"뭐 하나 되는 게 없다가 가끔 되니까 그렇게 행복한 거라고."
엉망처럼 살아온 것 같은데 가끔 뭐라도 되니까 그 재미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지나고 보면 이 모든 게 별 것 아닌 찰나의 추억들이 되어있겠지. 평온의 날을 무척이나 그려본다. 좋은 날이 오고 있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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